Exhibition
전시
유람하는 우연: 워킹 시뮬레이터에서 걷기로, 걷기에서 다시 관광으로
Touring Coincidence : From walking simulator to walking, from walking to sightseeing again
Touring Coincidence : From walking simulator to walking, from walking to sightseeing again
웜뱃
Wombat
디지털 게임에는 워킹 시뮬레이터 Walking Simulator라고 불리는 장르가 있다. 이름만으로 추측한다면 걷는 움직임을 생리학적으로 디테일하게 구현한 장르라고 오해할 여지가 다분하지만, 실제 게임플레이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1 그렇다면 어째서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었을까? 짐작 하다시피 이는 멸칭이다. 꽤 복잡한 방식으로 인터페이스와 끊임없이 상호 작용할 것을 요구하 는 여타 게임들과는 달리, 이 부류의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폴리곤의 세계를 (방향키를 눌러서) 한 번 둘러볼 것을 제안한다. 때로 플레이어들은 편지를 읽거나 문을 여는 등 의 간단한 조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할 만큼 급박한 사건은 벌 어지지 않거나 혹은 이미 한참 전에 벌어졌다. 즉, 여기에는 아드레날린을 유도하는 어떤 긴박함이 없다. 우리는 그저 그 세계를 천천히 ‘걸을’ 뿐이다. 작게는 조종하는 캐릭터의 목숨부터 크게 는 전 우주의 운명까지도 경각에 달린 상황에 익숙해진 많은 게이머들은, 할 일이라곤 고작 산책 정도인 이러한 게임의 목적은 바로 목적 없는 ‘걸음 그 자체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라며 비꼬았다. 이 장르의 역사는 이처럼 경멸 어린 시선과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멸칭으로 시작된 워킹 시뮬레이터라는 용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특수한 장르의 게임들이 전해주는 분위기와 플레이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걷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 하나는 스마트 워치 Smartwatch와 같은 센서들의 집합체가 생성해 내는 분절적인 데이터들2을 통합함으로써 재구성될 수 있는 신체적인 (그리고 좌표적인) 움직임의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러한 데이터의 집적만으로는 드러날 수 없는 측면이다. 이를테면, “오가는 나그네는 많으나 아는 사람은 전혀 없고 산천은 갈수록 첩첩한데 산도 설고 물도 설어 이백 리 밖 에 있는 집이 생각에 천 리도 같고 만 리도 같아 자연히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3와 같은 문장 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모두 ‘걷기’의 일부이다. 걷기의 이처럼 풍부한 여백은 역설적으로 인간 신체의 명백한 한계와 결부되어 있다. 환경에 노출된 신체와 그 몸의 상대적으로 느린 속력이 센 서에는 잡히지 않는 수많은 의미 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워킹 시뮬레이터는 (신체적 제한이 아니라) 시스템적 제한을 통해서 그 ‘여백’을 만들어 낸다. 플레이어들은 많은 경우 이 장르의 게임들에서 (달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점프’조차 할 수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 주변 환경과의 상호 작용 역시 극도로 제한된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이 노골적인 제약이 추동하는 결과는 게임적 보상이 명확하지 않은 세계이다. 여기서 보상이 굳이 레 어 아이템이나 많은 경험치 따위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퍼즐을 마침내 풀었다거나 혹은 미칠 듯이 난이도가 높은 보스를 스무 번의 시도 끝에 굴복시키고야 말았다는 식의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어려움을 해결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플레이어 들은 성취감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요는 대부분의 게임들에서 게임적 보상은 매우 엄밀한 precise 피드백이 요구되는 디자인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는 바로 이러한 보상 체계의 피드백을 흐릿하게 만든다. 워킹 시뮬레이터 게임이 플레이어들에게 주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어느 시의 부분만을 떼어다가 바로 그 부분의 주제는 무엇인지 골라 보라고 요구하는 수능 시험 문항만큼이나 기괴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는 (그것이 시뮬레이션하는) 걷기와 마찬가지로 정량적인 데이터, 그리고 명확한 보상에 따른 피드백 루프로는 완전히 반영될 수 없는 의미 작용을 유발한다. 그것은 어떠한 감흥,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관건은 그 여백이 거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워킹 시뮬레이터는 유저 인터페이스와 레벨 디자인의 시스템적 제한을 통해 ‘불투명한’ 세계를 산출한 뒤에, 비록 목표나 목적지도 분명치 않으며 심지어는 (확실한 보상을 통한) 그럴듯한 동기 부여마저 해줄 수 없지만 그냥 일단 한 번 걸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뻔뻔스럽게 등을 떠민다. 그 세계는 물론 개발자들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디자인한 공간이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경로로 각각의 플레이어들은 많은 경우 디자인의 의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경험한다. 그런데 실제 걷기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단순히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라면 다른 편리한 탈것 들을 이용하면 된다. 그럼에도 굳이 걷기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설사 지름길이라고 해도) 우리는 ‘필연적으로’ 예상치 못한 어떤 우연(한 사람, 느낌, 감정, 생각, 다리)들을 맞닥뜨린다.
「서유록」의 저자 강릉 김씨는 바로 그렇게 걸어서 강릉과 서울을 왕복한다. 이 기록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서울 구경’이라는 확고한 모티프가 있음에도, 저자가 글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강릉에서 서울까지 걸었던 경험에 할애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 글은 서울 구경 못지않게 서울까지 걷는 고행의 기록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김씨가 글의 말미에서도 노골적으로 강조하듯이,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을 둘러보고 충격을 받은 저자가 (특히 여성계의) 계몽을 촉구하는 것이 이 기록의 목적 아니던가? 만약 그렇다면 서울까지 걷는 와중에 등장하는 구구절절하게 세세한 이야기들은 그저 긴 사족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저자의 의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만 걷기가, 그리고 워킹 시뮬레이터가 그러하듯이 글은 종종 글쓴이가 설정한 의도와 디자인의 경계를 무심히 초과해 버린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서 강릉 김씨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확실히 쳐내야 할 부분을 ‘프로’답게 처리하지 못하고 장황하게 글을 마무리했다는 식의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서울로 가는 여정’은 어떻게 ‘서울 구경’과 연동되는가?
잊을 만하면 판소리처럼 다시 시작되는 김씨의 회한 어린 넋두리에도 불구하고 (혹은 역으로 그것들을 포함해서) 서울로 가는 여정 파트에는 ‘걷기’의 풍성함이 잘 녹아들어 있다. 그녀는 호기심 많은 관찰자이다. 노독이 쌓인 상태에서도 주변의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며, 난생처음 보는 “청색 홍색 두 가지 색 벽돌의 이층 양옥”4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한 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서울을 구경하는 파트에 들어서면 그녀는 마치 ‘관광객’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조선 후기에 태어난 강릉 김씨를 (대중 사회와 소비 사회의 형성과 함께 등장한) 근대적인 의미의 관광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그녀의 ‘구경’은 중세적인 의미에서 모험이나 순례가 아니며 그렇다고 영국 귀족들의 ‘그랜드 투어’도 아닌, 전형적인 관광객의 패턴을 따른다. 이는 김씨가 방문한 당시의 서울이 빠르게 근대화된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에서 반백 년을 살아온 그녀에게도 서울은 매우 낯선 곳이었던 것이다.
김씨의 서울 구경은 “굴러오는 유리집”5인 전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로도 그녀의 일정은 대부분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옥집’들과 돌로 지은 ‘은 행소’, ‘화륜거(기차)’, ‘자전거’, ‘자동차’, ‘동물원’, ‘식물원’, “신발명한 의학교 졸업”6한 의사 에게 진찰받음, ‘천주교당 뾰족집(성당)’, ‘우미관 활동사진(영화)’, ‘전기등’, ‘와사등’, ‘관립학교’, ‘사립학교’, ‘청년회관’, 새로 개편된 항구에서 ‘화륜선(증기선)’ 구경하기 등. 그중에서 “정거장에 가 화륜거 왕래하는 것을 다시 보고”7 온 부분은 특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그녀는 기차를 타고 극심한 멀미를 느낀 뒤에 다시는 화륜거를 탈 생각이 없노라고 확실히 못 박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화륜거가 운행하는 모습은 굳이 다시 보러 갈 만큼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인더스트리얼 투어리즘 Industrial tourism의 한 갈래로서, 산업단지의 복잡하고 현란한 불빛들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밤에 찾아가는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다 보면 아마도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도대체 관광 따위가 걷기의 ‘여백’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아즈마 히로키를 경유할 필요가 있다. 그의 책 『관광객의 철학』이 가지는 놀라운 점은 그가 경박한 동시에 얄팍하며, 소비나 해대는 관광객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긍정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는 대담하게도 관광객을 21세기적 주체로 전면에 내세울 뿐 아니라 바로 그들이 현재 세계가 직면한 가장 골치 아픈 정치적인 갈등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쥐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관광객이 ‘알고 보니’ 매우 사려 깊고, 문화적이며 자기 성찰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다. 관광객들은 여전히 관광할 뿐이다. “화집 한번 본 적 없는 문외한이 루브르 박물관에 가 <모나리자>를 보고, 한 번도 직접 요리해 본 적 없는 귀족이 파리에서 도살장을 견학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관광객들은 수많은 오해를 갖게 될 것이다. 관광객이 관광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다름 아닌 ‘오배’8가 새로운 이해나 소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관광의 매력이다.”9이렇게 착실히(?) 쌓인 오해와 착각들은 결과적으로 사람들 간의 ‘연대 아닌 연대’의 효과를 촉발한다. 관광객은 무책임하며 또 무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우연적인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연성이 예상치 못한 연대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이처럼 걷기와 관광은 때때로 많은 제약들로 인해서 고루하고 하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우연성이라는 큰 여백을 갖는다. 알고리즘적 감시 체계의 확산과 기존 정치 시스템들의 효용이 한계에 달한 현재 상황은 이 세계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계속해서 필연성의 디스토피아를 강요한다. 모든 것은 데이터로 환원되며, 다시 그 모든 것들의 움직임은 예측/계산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세계에서 우연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필연성의 협박은 너무나도 위협적이고, 정교해 보여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무작위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난수를 뽑아내는 방법으로 우연성을 ‘생성’해 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절박함에 휩싸인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래된 것들의 여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반도 최초의 관광객일지도 모르는 강릉 김씨의 여정이 보여주는바 세상은 ‘연산할 수 없는’ 역동적인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도래할 존재는 필연적인 타자가 아니라 우연적인 관광객일 것이다.
1. 폴리곤의 <Ranking walking simulators by how good the walking is> 영상이 재치 있게 보여주듯이 걸음의 신체적인 측면과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 는 큰 교집합을 가지지 못한다. https://www. youtube.com/watch?v=ZQst_ UtBj6c
2. 고유한 생리학적 특성들은 흔들리는 팔의 가속도, 심박수, 보폭의 일관성 그리고 걷는 속도 등의 데이터로 추출된다.
3. 의유당, 금원, 강릉 김씨,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 김경미 역 (서울: 나의시간, 2019), 187.
4. 같은 책, 188
5. 의유당, 금원, 강릉 김씨,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 김경미 역 (서울: 나의시간, 2019), 194.
6. 같은 책, 206.
7. 같은 책, 207.
8. “어떤 물건을 지정된 곳에 잘 배달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배’, 즉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상태.”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안천역 (서울: 리시올, 2020), 164.
9. 같은 책, 164.
In the arena of digital game, there is a genre called Walking Simulator. The name could instantly mislead us to thinking that this game would realize in detail the walking movement physiologically, but the actual game is quite far from it.1 Then, how is it that it acquired such a name? As you might have guessed, it is a derisive nickname. Whereas other games require incessant interaction with the interface in a fairly complex manner, walking simulator-type games propose to the players to browse through(by pressing the arrow keys) the world of polygons. Sometimes, players would try out simple operations such as reading a letter or opening a door. There has been no imminent event happening for the players to react instantly, or it has happened long time ago. That is, there is no sense of urgency inducing any adrenalin. We are simply ‘walking’ slowly in that world they have created. For gamers who are used to dealing with the character’s lifeline at every moment of their playing, or with the destiny of the whole world at their hands, such games which make you simply take a walk make them scoff. They would say that the purpose of such games is ‘simulating the walking itself’ without any aim. Thus, the history of this genre is linked to such scornful view to some extent.
However this term walking simulator which began as a derogatory remark ironically describes the mood of this special genre and the emotion felt by the player quite accurately. Walking has two coexisting aspects. First, the physical(and coordinate-based) aspect of movement that can be reconstructed by integrating segmented data 2 created through an aggregate of sensors such as smartwatch. The other aspect is the one that cannot be revealed through such accumulation of data alone. For example, the emotions revealed through expressions like “There are many people going about their ways but I do not know anyone,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are getting thicker and denser, I am unfamiliar with the landscape. My house which is 200 li away from here seems like a 1,000 li or 10,000 li, so I gradually feel regretful for having left home.”3are all a part of the ‘walking’ experience. This abundance of margin in walking is paradoxically linked to the obvious limitations of the human body. The body exposed to the environment and its relatively slow speed create numerous reactions of meanings that cannot be captured by sensors.
Walking simulators create that ‘room of margin’ through systematic limitations(rather than physical limitations). In many cases, players cannot even ‘jump’(let alone run) in this genre of games. As mentioned earlier, interaction with the surrounding environment is also extremely limited. Interestingly, the result of these blatant restrictions is a world where game rewards are unclear. Here, the compensation does not necessarily have to be in the form of a rare item or abundant experiences points. For example, players enjoy the sense of achievement through episodes of having solved a very time-consuming complex puzzle, or having defeated an incredibly difficult boss after 20 attempts. Thus they are rewarded just by solving a certain difficulty. In summary, in most other games the compensation is an object of design which requires a very precise feedback. But the walking simulator genre blurs the feedback of such compensation system. So then, what is the essence of the reward given to the players of such games? This is like a bizarre SAT question giving students a part of a poem to guess what the theme is about.
The walking simulator genre, like the walking itself(which it simulates), eventually evokes significations that cannot be fully reflected in quantitative data and feedback loops based on clear-cut rewards. They may be certain inspirations, or unfathomable anxiety, or both. The key is that the room of margin is not only huge, but it rather determines the character of the whole experience. Walking simulators calculate an ‘opaque’ world through systematic limitations in the user interface and level design. Although there is no clear goal or destination, and they cannot even provide plausible motivation(through concrete rewards), they simply nudge you in a bold manner to just have a go at walking. That world, of course, is a space designed with great care by developers, step by step. However, through unexpected paths, each player often experiences something that goes beyond the intent of the design. But isn’t that true with the actual walking experience as well? If you simply want to get to a specific destination as quickly as possible, you can ride convenient vehicles. But if you still choose to walk(even if it is a shortcut), you will ‘inevitably’ encounter some unexpected coincidences(person, feeling, emotion, thought, bridge).
Lady Kim from Gangneung, the author of Seo-Yu-Rok, walks back and forth between Gangneung and Seoul just like that. One of the reasons why this record is gripping is that although there is a clear motif of ‘sightseeing Seoul,’ the author devotes almost half the text to the experience of walking from Gangneung to Seoul. In short, this essay is as much a record of the hardship of walking to Seoul as it is of visiting Seoul. The author was shocked by her observations of rapidly changing Seoul, and she explicitly emphasizes at the end of her essay, a purpose. It seemed that the purpose of this record was to call for enlightenment(especially in the female community). If so, aren’t the detailed stories about her walking trip to Seoul just some unnecessary beating around the bush? Probably so, if we take the author’s intention simply at face value. However, as with walking and walking simulators, writing often inadvertently travels beyond the boundaries of pre-set intention and design. Therefore, I refuse to evaluate her essay as the result of Kim being an ‘amateur’ writer, not being able to decisively omit some parts as a ‘professional’ would do and ending the piece in a long-winded manner. Rather, I think we should ask ourselves in a different way: how does this ‘journey to Seoul’ engage with ‘sightseeing Seoul?’
Despite Kim’s regretful complaints, which start all over again like a pansori tune just when one thinks it’s done with, (or rather, when considering these complaints), the richness of ‘walking’ is well incorporated in this description of the itinerary to Seoul. She is a curious observer. Even in her weariest state on the road, she is con-stantly inquisitive about the surroundings and takes a closer look at a “two-story Western- style building made of red and blue bricks”4 which she has seen for the first time in her life. But when she is narrating her main exploration of Seoul, she starts to behave like a ‘tourist.’ Obviously, strictly speaking, it is difficult to regard Lady Kim of Gangneung clan, bor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a tourist in the modern sense(of which the notion emerged with the formation of mass society and consumerist society). However, in this record, her ‘sightseeing’ is not an adventure or pilgrimage in the medieval sense, nor is it the ‘grand tour’ of the English nobles, but follows the typical touristic pattern. This is not unrelated to the historical context that Seoul at the time Kim visited was rapidly transforming into a modernized city. Seoul was a totally foreign place even for her, who had lived on the Korean Peninsula for half a century.
Her tour of Seoul begins with a ride on the “rolling glass house”5 which is the tram. From there, most of her schedule is filled with experiencing ‘new cultures’ such as Western- style houses, a bank built of stone, train, bicycle, automobile, zoo, botanical garden, and being examined by a doctor “graduated from medical school that has made new inventions,” Catholic Church pointy-looking house, Wumigwan Cinema, electric light, gas lamp, public school, private school, Youth Center, and watching steamboats at the newly furbished port. Among these observations, the part about “going to the station and seeing the comings and goings of the train again”6 is particularly interesting because she clearly states she has never going to ride the train again after having had extreme motion sickness on her ride. Nevertheless, the sight of the train in operation must have been so fascinating that she had to go see it again. This is a sort of industrial tourism, reminding us of trips made on purpose at night to see the complex and dazzling lights of an industrial complex. But the reader of this essay would wonder by now, what does this tourism bit have to do with the ‘room of margin’ of walking?
At this point we need to make a detour by way of Hiroki Azuma. The surprising thing about his book Philosophy of the Tourist is not about the fact that he simply considers the existence of tourists in a positive light, who are frivolous and shallow consumers. Not only does he boldly bring tourists to the fore as the 21st century’s major subject, he also suggests that they hold the key to resolving some of the most troubling political conflicts currently facing the world. The reason is not that tourists ‘turn out’ to be very thoughtful, cultural and self-reflective beings. Tourists do what they do best; just sightseeing as ever. “A layman who has never laid eyes on an art book goes to the Louvre to see the Mona Lisa, and an aristocrat who has never cooked his own food tours around a slaughterhouse in Paris. Obviously, tourists will have numerous misunderstandings during their tours. It is difficult to expect for tourists to properly understand their object of tourism. Nevertheless, none other than ‘wrong delivery’ may become an opportunity for new understanding or communication. That is the charm of tourism.”7 Such steadily(?) accumulated misunderstandings and illusions ultimately trigger the effect of ‘solidarity while not being solidarity’ between people. Tourists can be irresponsible and ignorant, butthey can also be very coincidental beings. And this coincidence ends up creating the possibility of unexpected solidarity.
As such, sightseeing while walking may sometimes seem old-fashioned and trivial due to its limitations, but perhaps that is exactly why they possess a large margin of coincidence. The current situation, in which the expansion of algorithmic surveillance systems and the effectiveness of existing political systems have reached their limits, continues to impose a certain dystopia of inevitability on everyone bearing the ways of this world. This is because coincidence is impossible in a world where everything is reduced to data and movements of all things are purportedly predictable/calculated. The threat of inevitability seems too intimidating and sophisticated that people are overwhelmed by a sense of desperation; they feel as if they must somehow even ‘generate’ contingency by using a randomized algorithm, extracting random numbers. Perhaps we are missing the margin of old things we think we already know well enough. As the journey of Lady Kim of Gangneung who could well be Korea’s first proper tourist has shown us, the world is full of ‘incalculable’ dynamic coincidences. Hence this brings a fortuitous tourist to the fore, not the inevitable other.
1. Polygon(a Youtube channel dedicated to video games)’s witty video Ranking walking simulators by how good the walking is shows us that the physical aspects of walking and the walking simulator genre do not have much of an intersection. https://www.youtube.com/watch?v=ZQst_ UtBj6c.
2. Physiological characteristics are extracted as data such as a swinging arm’s accelerated velocity, heart rate, consistency of the stride, and walking speed.
3. Euiyudang, Geumwon, Lady Kim of Gangneung, Women, Dreaming of Travels Long Time Ago, trans. by Kyungmee Kim (Seoul: My Time, 2019), 187. Li is the traditional Korean measurement of approx. 400 meters.
4. Euiyudang, Geumwon, Lady Kim of Gangneung, Women, Dreaming of Travels Long Time Ago, trans. by Kyungmee Kim (Seoul: My Time, 2019), 188.
5. Ibid., 194.
6. Ibid., 207.
7. Hiroki Azuma, Philosophy of Tourism, Korean translation by Cheon Ahn(Seoul: Lucioles, 2020),165.